내가 담당자라면
피클은 정확한 회의실 이름을 몰랐다. 상대방이 되묻자 오픈 스터디룸과 좌석 수, 예약 앱이 나왔다. 피클이 정보를 들고 있었던 게 아니라, 상대방이 빈칸을 채웠다. 통화는 받는 쪽이 빈칸을 채우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가령 행사를 함께 준비하는 동료의 비서가 장소 세 곳을 골라 견적 비교표를 보내왔다고 해보자. 표에는 날짜와 수용 인원, 대관료가 적혀 있다. 추천하는 곳과 그 이유도 있다.
장소를 알아보는 일은 내가 맡기로 했는데, 동료의 비서가 먼저 자료를 모아왔다. 나는 견적부터 연다. 후보 세 곳을 찾는 일은 끝났고, 표에 빠진 확인 항목을 찾는다.
비서가 어디까지 확인했는지에 따라 내가 이어갈 일이 달라진다. 견적을 언제 받았는지 묻고 링크를 연다. 전부 다시 찾으면 앞에서 한 일을 반복한다. 표가 왔다고 조사가 끝난 것도 아니다.
나는 좌석 배치를 다시 알아봐달라고 한다. 수용 인원보다 참석자들이 서로 마주 앉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조건을 보탠다. 그 비서가 이미 좌석 배치까지 살펴봤다면 설명을 듣는다. 설명을 듣고 내 기준을 바꾼다.
그 비서도 조건을 따져 장소를 추천했다. 나도 확인할 내용이 생기면 자료를 다시 찾는다. 조건 하나를 바꾸면 후보 세 곳이 모두 달라진다.
그동안은 AI에게 내 일 중 무엇을 넘길지 주로 생각했다. 남의 비서와 일하면, 내가 넘기기도 전에 다른 쪽에서 일을 시작해놓는다.
내게 장소를 찾아달라는 것인지, 이미 찾은 세 곳을 검토해달라는 것인지부터 다시 묻는다. 예전에는 둘 다 ‘장소 좀 알아봐줘’라는 부탁에 들어 있었다.
나는 우선 “제가 한번 볼게요”라고 답한다. 평소에도 쓰던 말이다. 그 비서가 보낸 표를 옆에 띄워놓고 검색창을 연다.
그 표를 받은 순간, 내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