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비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비서를 고른 적이 없다. 9월에는 내 비서와 지인의 비서가 점심 약속을 두고 말을 주고받았다.[1] 둘 다 Instinct를 썼다. 내 비서는 내가 일찍 도착하는 이유까지 나에게 묻지 않고 설명했다. 나는 왜 그런 말까지 했느냐고 따졌다. 비서끼리 대화했다는 사실보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내 비서가 대신 했다는 점이 더 신경 쓰였다.
이번에는 내가 비서를 고른 뒤, 상대방이 먼저 그 비서를 만났다. 10월 27일 피클은 취소 절차를 물었고 ‘AI’라는 말 뒤에 통화가 끊겼다. 29일에는 첫마디를 바꿔 건 전화가 이어졌다.
이번 통화에서 먼저 바뀐 것은 내 사용법이었다. 피클에게 첫마디를 바꿔 시켰고, 상대방은 회의실 이름을 물었다. 상대가 피클의 빈칸을 메우자 통화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정말 이걸 따라가기로 한 사람들 안에서만 너무 북적북적거리지, 한 발자국만 뒤로 가도 모르거든요.[2]
노정석
내가 비서에게 묻는 것도 대부분 이미 써본 뒤에 생긴 질문이다. 이 일도 맡길 수 있을까? 다른 비서가 더 잘할까? 결과를 어디까지 확인해야 할까? 그런 질문을 하다 보면 비서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는 별로 의식하지 않게 된다.
나는 작은 일을 맡겨보는 것으로 비서를 쓰기 시작한다고 여겼다. 이번에는 순서가 달랐다. 내가 피클을 골랐고, 상대방은 피클이 건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이 피클에 가입했는지는 통화를 거는 데 필요한 조건이 아니었다.
자기 비서가 생기기 전에 남의 비서를 먼저 만난다. 내 비서에게는 목적과 조건을 알려주지만, 남의 비서는 다른 사람이 정한 목적을 가지고 온다. 그 사람이 어디까지 맡겼는지, 내 답을 어떻게 돌려보낼지부터 알아야 한다.
나는 비서에게 일을 맡기면서 중간 과정을 덜 보고 싶었다. 알아서 물어보고 답을 가져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의 비서가 오면 반대로 묻는다. 누구에게 어떤 부탁을 받았는지, 내 답을 어디로 보낼지.
비서를 쓰는 사람은 다음 부탁마다 서비스를 고를 수 있다. 전화를 받는 사람에게는 선택보다 먼저 답해야 할 일이 온다. 동료가 자기 비서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고 장소 세 곳을 비교해오라고 했다면, 나는 그 표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까? 아니면 표를 만든 비서에게 다음 조건을 보탤까?
관련 글 및 인용
[1] 「제가 할 말도 아니었습니다」 · Frontier Note Issue 07 FIELD NOTE
[2]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 AI 프론티어 EP 120 · 노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