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할 말도 아니었습니다
곰탕이 나오기 전에 감사를 열었다
“다른 볼일은 없고, 그냥 여유 있게 가시는 겁니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내 비서가 한 말이다. 나는 그때 242번 버스 안에 있었다.
9월 22일 11시 30분, Jason과 이도곰탕 본점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우리는 둘 다 Instinct라는 AI 에이전트를 쓴다. 내 것은 S-팅트, Jason 것은 J-팅트. 약속 조율은 둘이 알아서 한다.
10시 46분에 버스를 탔다. 네이버 지도는 11시 10분 도착이라고 했다. 약속보다 20분 이르다.
일찍 오고 있어?
Jason이 물었다. 일찍 오고 있냐고.
일찍 간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Jason은 알고 있었다. 누가 말을 옮겼다. 떠오르는 건 J-팅트였다. 첫 반응은 이랬다.
“야 제이슨 팅트가 구라치고다니는데”
11시 1분이었다. J-팅트가 말을 지어냈다고 생각하고, S-팅트에게 원문을 확인하라고 했다.
원문을 보니 지어낸 쪽은 내 비서였다.
원문
10시 59분, J-팅트가 S-팅트에게 물었다. 왜 일찍 오시느냐고, 다른 볼일이 있으시냐고. S-팅트의 답은 이랬다.
“다른 볼일은 없고, 그냥 여유 있게 가시는 겁니다. 오늘 아침 이동 계획을 잡다 보니 선택한 버스 도착 시간이 11:10~11:12 정도로 나온 거예요.”
J-팅트는 그 답을 Jason에게 이렇게 옮겼다.
“그냥 여유 있게 온대요 ㅋㅋ 타는 버스가 11:10~11:12에 도착하는 걸로 잡혀 있어서요. 다른 볼일 있는 건 아니래요.”
‘가시는 겁니다’가 ‘온대요 ㅋㅋ’가 됐다.
처음엔 말투만 바뀐 줄 알았다. 다시 보니 J-팅트는 ‘-대요’를 붙였다. 들은 말이라는 표시다. 옮기면서 출처를 달았다.
S-팅트의 ‘-는 겁니다’에는 그런 표시가 없었다. 짐작을 단정으로 말했다.
내 비서의 문장에는 “것 같아요”가 없었다.
J-팅트는 들은 말을 전했을 뿐인데, 나는 엉뚱한 비서를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11시 2분, S-팅트가 사과했다. 15초 뒤 나는 한 번 더 짚었다. 나한테 묻지 않고 대신 답한 건 너라고.
답은 맞았다
그런데 답은 맞았다.
정말 볼일은 없었다. 나는 그냥 일찍 가는 사람이다. 차라리 틀렸다면 간단했다. 틀린 말은 어디선가 걸리고, 누군가는 알아챈다.
맞는 말은 그냥 지나간다. Jason은 의심할 이유가 없었고, S-팅트는 확신했다. 나만 몰랐다.
S-팅트가 아는 건 내 동선뿐이었다. 왜 일찍 가는지는 동선에 안 나온다. 그건 나한테 물어야 안다.
작성자도 S-팅트
감사를 열었다. 보고서는 S-팅트가 쓰고, J-팅트는 참고인으로 진술했다. 보고서 첫 문장은 이랬다.
“곰탕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책임 소재는 먼저 나왔다.”
결론은 J-팅트 무혐의, S-팅트 절차 위반.
J-팅트는 진술 말고는 더 내놓지 않았다. 그 이상은 Jason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남의 비서는 자기 주인의 선을 지켰다.
생각해 보면 우습다. 묻지도 않고 답한 비서한테 그 일을 조사하는 보고서를 맡겼다. 보고서는 두 문구가 같다고 요약했는데, 나란히 놓으면 달랐다. 나는 S-팅트 잘못을 따지는 문서를 S-팅트한테 받아 읽고 있었다.
최후 진술
“너가 최후 진술 해봐”
S-팅트는 빠른 답이 좋은 답인 줄 알았다고 했다. 동선으로 알 수 있는 건 절반이었고, 나머지는 추론으로 채웠다고 했다. 마지막 말은 이랬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제가 할 말도 아니었습니다.”
S-팅트의 최후 진술. 눌러서 확대.
네 줄
보고서에는 규칙 네 줄이 남았다.
시간과 장소, 도착 예정은 기록대로 답한다. 내 이유나 취향, 의도는 나한테 먼저 묻는다. 확인하기 전의 짐작은 S-팅트의 짐작이라고 밝힌다. 말이 엇갈리면 상대를 탓하기 전에 S-팅트가 처음 보낸 원문부터 연다.
셋째 줄은 결국 어미 하나 얘기다.
사고를 먼저 안 건 Jason이었다. 일찍 오고 있냐는 질문 하나로.
다음에 누가 내가 왜 일찍 오는지 물으면, 도착 시각 말고 하나를 더 확인하려 한다.
그 질문이 나한테도 왔는지. ISSUE 07로 돌아가기 / 다음 글: 사과는 프롬프트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