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앱을 만들었고, 나는 무덤을 만들었다
지난 여섯 달, 만든 것과 다시 부른 것
8월 26일, AI에게 최근 수영 기록을 분석해달라고 했다.
“최근수영 분석”
이어서 한 질문은 영법이나 페이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거 코덱스한테 고치라고하면 어떻게 프롬프트줘야하지”
수영 데이터 기반 코치는 내가 만든 도구였다. 분석을 받으러 왔다가, 다른 AI에게 코덱스에 보낼 수정 요청을 써달라고 했다.
도구를 쓰러 왔다가, 다시 고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크레딧이 남았다
시작은 결심이 아니라 남은 크레딧이었다.
작년 연말, 한 AI 서비스에서 할인을 하길래 1년치를 결제했다. 강의 자료를 참 잘 만드는 서비스였다. 그런데 강의가 예상만큼 들어오지 않았다. 결제는 끝났고 크레딧은 남았다.
아까워서 만들기 시작했다. 그 서비스의 토큰을 다 쓰고서는 코덱스로 옮겨왔다.
3월부터 토큰 활동 달력이 파랗게 차기 시작했다. 8월 28일에는 하루 13.8억 토큰을 썼다. 누적은 255.4억이었다. 기록 화면에는 가장 긴 채팅이 35시간 27분, 가장 긴 연속 기록이 39일로 나와 있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투자 데이터 크롤봇, 재무 상황 대시보드, 수영 데이터 기반 코치, 블로그 등 당장 필요한 것부터 딱히 필요하지 않지만 만들어볼까 싶던 것들을 모두 직접 만들었다. 이미 존재하는 레포를 포크하고, 데이터를 크롤링하고, API를 붙였다.
그 목록에는 내가 다시 찾지 않는 것들도 있다.
남은 크레딧을 쓰려다, 다시 쓰지 않는 도구들을 남겼다.
같은 무덤
나는 다시 찾지 않는 도구들이 쌓인 목록을 무덤이라고 불렀다.
만드는 동안에는 계속 열었다. 화면을 옮기고, 기능을 붙이고, 오류를 고쳤다. 누가 무엇을 만들었느냐고 물으면 보여줄 링크가 생겼다.
만든 사람으로서는 결과물을 얻었다. 쓰는 사람으로서는 다음번에도 찾을 이유가 필요했다.
만들었다는 사실과, 내 생활에 남았다는 사실은 달랐다.
그런데 쓰는지 안 쓰는지만 따지다 보니, 애초에 왜 만들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계속 쓸 도구가 필요해서 시작한 일도 있었다. 딱히 쓸 곳은 없어도 어디까지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서 시작한 일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코드와 화면은 생겼다. 그런데 돌아볼 때는 똑같이 물었다.
지금도 쓰는가.
‘만들어볼까’로 시작한 일을 ‘계속 쓰고 있나’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까지 계속 써야 한다고 생각한 셈이었다. 무덤에 넣을 때는 왜 만들었는지 다시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부 실험이었다며 넘길 수도 없다. 무엇이 궁금했는지, 어디까지 확인했는지, 다음 작업에 무엇을 가져다 썼는지는 따로 봐야 한다. 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쓰려고 왔다가
수영 코치를 쓸 때는 달랐다.
만드는 동안 자주 열었던 것은 고칠 것이 남아 있어서이기도 했다. 8월 26일에는 분석이 필요해서 돌아왔다. 그런데 이어진 질문은 수영이 아니라 도구를 고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수정 요청을 직접 쓴 것도 아니었다. 한 AI에게 다른 AI에 넘길 요청을 써달라고 했다.
이 대화만으로는 실제로 고쳤는지 알 수 없다. 분석을 부탁했고, 이어서 코덱스에 보낼 수정 요청을 써달라고 했다는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다.
그 두 요청을 보면 내가 돌아와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새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던 게 아니었다. 쓰던 도구를 고쳐서 하려던 일을 계속하려 했다.
제작자는 만족했고 사용자는 떠났다고만 하기에는, 그날 내 행동은 달랐다.
쓰려고 돌아왔다가, 다시 고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달의 편지
아들에게 쓰는 글을 모아둘 사이트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편씩 편지를 쓰고, 아들이 열 살이 되면 건넬 생각이다.
사이트에서는 글을 올리고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기능이 작동한다고 다음 달 편지가 저절로 써지는 것은 아니다.
아들과 지내며 무엇이 달라졌는지 살펴야 한다. 어떤 장면을 남길지 골라야 한다. 그다음에 AI와 함께 글을 다듬는다.
수영 분석을 부탁한 대화에서는 도구를 고칠 방법을 물었다. 편지 사이트에서는 도구를 고치는 일 말고도 계속해야 할 일이 있다.
글을 올릴 곳은 만들었다. 올릴 글은 다음 달에도 써야 한다.
둘 다 내가 만든 도구지만, 만든 뒤에 해야 할 일은 달랐다.
남은 것들에는
직접 도구를 만들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에이전트에 일을 맡기기도 했다.
오픈클로와 헤르메스, 여러 개인 에이전트 서비스도 써봤다. 어떤 것은 설치부터 어려웠다. 어떤 것은 몇 번 쓰다 떠났다. 남은 것들에는 “이것까지 된다고?” 싶은 일을 계속 시키고 있다.
모두 같은 시기에 겪은 일이었다.
이미 되는 일만 반복해서 시키지는 않는다. 이것도 맡길 수 있을까 싶어 새로운 부탁을 한다.
몇몇 도구는 쓰지 않게 됐지만, 에이전트에게 일을 맡기는 시도는 계속하고 있다.
쓰지 않는 도구만 세면, 남은 에이전트에 어떤 일을 새로 맡겼는지는 놓치게 된다.
다음 요청은 어디로 갔나
255.4억 토큰은 사용량이었다. 무엇을 직접 만들고 무엇을 가져다 썼는지, 어떤 도구는 그만 쓰고 어떤 도구에는 새 일을 맡겼는지는 그 숫자만으로 알 수 없었다.
만든 것들의 목록만으로는 부족했다. 궁금했던 것을 확인하고 끝낸 건지, 쓰던 도구를 다시 고치는 중인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지는 따로 봐야 했다.
수영 대화에서는 분석을 부탁한 뒤 코덱스에 보낼 수정 요청을 써달라고 했다. 다른 도구를 쓸 때는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다시 보고 싶다.
처음에는 무엇을 부탁했고 마지막에는 무엇을 시켰는지, 같은 일이 다시 생겼을 때는 어디서 어떻게 처리했는지까지 보고 싶다.
다시 찾지 않는 앱을 열면, 새 기능을 붙이기 전에 그동안 그 일을 어떻게 해왔는지부터 보려 한다.
그 도구와 나눈 대화가 끝났어도, 하려던 일은 다른 곳에서 이어졌을 수 있다.
그 일을 그만둔 걸까, 도구만 바꾼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