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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은 붙여 넣을 수 있었지만, 그 글을 방어하는 답은 내 손을 거쳐야 했다.
“내가 아까 이미 그 얘기했잖아.”
이 문장은 다른 AI가 써준 문장이 아니었다. 초안 작성란에는 AI가 만든 글을 그대로 붙여 넣을 수 있었지만, 초안을 제출한 뒤 시작된 공방의 답변창에서는 붙여 넣기가 되지 않았다. 질문을 읽고, 그 자리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키보드로 직접 답을 쳐야 했다.
직접 타이핑했다고 해서 그 말이 곧바로 순수한 내 생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차이는 컸다. 초안에서는 이미 완성된 문장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공방에서는 내가 이해한 만큼만 다시 문장으로 만들어야 했다. 오타가 났고, 같은 말을 반복했고, 질문이 이어질수록 말투도 거칠어졌다.
나는 이미 적용할 직무를 골랐고, 잘못 뽑았을 때의 손실이 개인 성과 부족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고객 프로젝트 손실로 번지는 직무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논술 AI는 같은 비용 조건을 표현을 바꿔 다시 물었다.
나는 답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논술 AI는 아직 더 물을 것이 있었다.
처음부터 질문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앞선 질문들은 초안에서 내가 지나친 곳을 정확히 꺼냈다. 문제는 내가 뜻을 충분히 전했다고 생각한 뒤에도, 그 판단을 제출 가능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계속됐다는 데 있었다.
몇 시간 전, 나는 이 글의 초안을 다른 AI에게 맡겼다.
“초안 써봐”
한 온라인 논술대회에서 채용과 대학 학위에 관한 질문이 주어졌다. 나는 평소 쓰던 AI를 열어 먼저 대회의 진행 방식과 평가 기준을 보여줬다. 사례 자료도 넘겼다. 그리고 짧게 적었다.
“이걸 읽고 이제 초안을 써야하는데 초안 써봐”
첫 번째 AI는 대회를 해석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어떤 입장을 분명히 세워야 하는지, 반론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주어진 사례에서 어떤 근거를 끌어와야 하는지를 먼저 정리했다. 이어 규제나 자격이 필요한 일부 직무를 제외하고는 대학 학위 요건을 없애자는 방향을 제안했다. 학위 대신 포트폴리오와 실무 과제, AI 활용 기록을 보고, 학위는 여러 참고 신호 가운데 하나로 남기자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 방향을 골랐다. AI는 그 방향을 장문의 초안으로 만들었다. 학위가 성실성과 기초 소양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반론도 들어 있었고, 새로운 평가 체계를 만드는 데 비용이 든다는 지적도 미리 받아쳤다. 초안은 그 비용을 이렇게 불렀다.
“채용 시스템 전환 비용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회사의 미래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로 보아야 한다.”
읽을 때는 맞는 말처럼 보였다. 문장도 매끄러웠고, 반론까지 들어가 있었다. 나는 이 초안을 그대로 붙여 넣었다.
오래 붙잡고 쓴 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용을 보지 않고 복사한 글도 아니었다. 방향은 내가 골랐고, 첫 번째 AI는 그 방향을 제출할 수 있는 한 편의 글로 만들었다. 다만 모든 근거를 내가 직접 설명할 수 있는지 확인한 뒤 낸 것은 아니었다.
문장은 먼저 도착했다. 그 문장을 지탱할 기준은 아직 흐렸다.
내가 제출한 문장들이, 내가 쓰지 않은 순서로 돌아왔다
초안을 넣자 점수나 첨삭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화면에는 정독, 논증 지도, 취약점 검토, 공방 점검이라는 네 단계가 떴다. 이어 이런 문장이 나타났다.
“곧, 당신의 논증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겨냥한 질문이 도착합니다.”
약 2분 뒤, 선형으로 쓴 글은 상자와 화살표의 지도로 돌아왔다. 중심 주장과 근거가 갈라졌고, 예상 반론은 다른 상자에 놓였다. 서로 기대는 주장 사이에는 선이 생겼다.
이 대화를 맡은 것은 딥스킬이 만든 논술 AI였다. 첫 번째 AI가 글을 썼다면, 논술 AI는 무엇이 이 글의 중심이고 어느 근거가 약한지를 다시 정했다.
내가 제출한 문장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쓴 순서는 아니었다.
첫 질문을 받은 뒤 나는 평소 쓰던 AI 창으로 돌아가 이렇게 적었다.
“딥스킬 논술 인공지능이 물어보기시작했따 나의 논지 강화를 위해서 물어보나봐”
한쪽 창에서는 논술 AI의 질문에 답했다. 다른 창에서는 방금 벌어진 일을 기록했다. 참가하던 나는 중간에 이 장면을 글감으로 보기 시작했다.
처음 질문은 맞았다
논술 AI는 학위가 좋은지 나쁜지만 묻지 않았다. 학위 요건을 없애고 프로젝트 기반 검증을 도입한다면 평가자 시간이 들고, 과제를 설계하고 채점해야 하며, 지원자가 이탈하거나 채용 속도가 느려질 수도 있다고 짚었다. 첫 초안은 이런 비용을 ‘전략적 투자’라는 말로 지나갔지만, 어느 직무에서 그 투자가 실제로 이익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술 AI는 물었다.
“최소한 어느 직군에서 조기 퇴사와 재채용, 프로젝트 지연 감소분이 프로젝트 기반 채용 비용을 넘는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맞았다. 나는 모든 직무에 적용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초기 미스핏의 비용이 큰 직무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범위를 줄였다. 답변창에는 다른 AI의 문장을 붙여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답은 질문을 읽고 그 자리에서 직접 쳤다.
“당연히 모든직군에 적용하는것은 말이되지않아. 초기 미스핏으로 비용이 큰 직군에 먼저 적용한다.”
논술 AI는 어느 직군인지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나는 AI 기반 운영 최적화, 자동화 업무라고 답했다. 회사의 핵심 사업이 물류와 결제 시스템 최적화이고, 이 직무의 실패는 한 사람의 낮은 성과로 끝나지 않는다고 봤다. 잘못된 자동화 설계와 데이터 해석은 고객 프로젝트 지연, 운영 병목, 결제 오류로 번질 수 있었다.
처음 초안의 ‘대부분의 직무’라는 큰 주장에 적용 조건이 생겼다. 질문은 없던 입장을 새로 만들기보다, 넓은 입장을 어디까지 밀 수 있는지 경계를 그었다.
말은 통했지만, 글에 넣기에는 부족했다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나는 이 논점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논술 AI는 직군을 고른 점을 인정한 뒤, 새 검증 때문에 느려지고 더 드는 비용보다 무엇이 얼마나 자주 터져야 이익이 되는지 다시 물었다.
내 말투가 달라졌다.
“야 회사가 망하게 생겼는데 지금 아직도 알오아이계산하게생겼니? 잘못뽑은 사람은 개인 성과부족으로 끝나지않고 회사 명예를 실추하고 레퓨테이션을 망치고 재작업이라는 큰 복리 비용으로 돌아와.”
논술 AI는 집에 불이 날 수 있다고 모든 방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수는 없다는 비유를 들었다. 막을 수 있는 손실이 큰 직군만 골라 새 검증의 지연과 부담을 감수한다는 기준을 글에 넣어보자고 했다.
나는 적었다.
“내가 아까 이미 그 얘기했잖아”
논술 AI는 다시 적용 직군을 한 줄로 쓰고, 왜 그 직군은 채용 속도 저하와 과제 비용을 감수할 만한지 기준을 붙여보라고 했다. 나는 같은 판단을 더 직접적으로 다시 썼다.
“위에서 다 얘기했잖아 이친구야. 미스핏 채용으로 인한 비용이 개인성과부족이 아니라 고객 프로젝트 손실로 전이되는 직군이라 채용 지연 비용보다 검증 강화의 편익이 더 크다고. 왜 이해를 못함?”
그제야 논술 AI는 내 논지를 정리했다. AI 운영 최적화, 자동화 직무는 미스핏 비용이 개인 성과 부족을 넘어 고객 프로젝트 손실과 신뢰 하락으로 번지기 때문에, 채용 지연보다 검증 강화의 편익이 더 크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뜻이 전달되면 답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논술 AI는 직군은 이미 잡혔지만, 그 이유가 제출 가능한 문장으로 충분히 정리됐는지 계속 확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둘 가운데 하나만 맞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의미는 이미 전달돼 있었다. 다만 논술문에 넣을 기준은 여러 답변에 흩어져 있었다. 논술 AI가 같은 지점을 놓지 않은 덕분에 주장은 더 구체적이 됐고, 같은 이유로 대화는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방에서 직접 친 문장에는 그 마찰이 그대로 남았다. 매끄러운 초안에는 없던 오타와 반복, 짜증 섞인 말투가 나타났다. 직접 타이핑하게 하는 조건이 생각의 진위를 보증하지는 않지만, 이미 완성된 문장 뒤에 숨기는 일은 어렵게 만들었다.
논술을 하다가 논술 AI를 묻기 시작했다
질문이 같은 비용 조건을 계속 파고들자, 나는 논술 주제에 답하는 일을 멈추고 논술 AI 자체를 물었다.
“니가 왜 내가 하는 말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자기 말만 계속하는지 좀 구체적으로 알고싶다. 너는 지금 어떤 파운데이션 모델로 응답하고있니?”
처음에는 논술 AI가 내 글을 분석했다. 이제는 내가 이 AI가 어떤 기준으로 질문을 이어가는지 따지고 있었다.
논술 AI는 기반 모델 정보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다. 대화가 어긋난 이유에 대해서는, 직군은 이미 잡혔지만 그 근거가 제출 가능한 문장으로 충분히 정리됐는지 계속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어 이 논점을 여기서 마무리할지 먼저 물었다.
나는 답했다.
“마무리해”
공방은 거기서 끝났다. 내가 끝내라고 말할 때까지 논술 AI가 무한히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다. 논술 AI가 먼저 마무리를 제안했고,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한 가지 어긋남은 남았다. 내가 충분히 설명했다고 느낀 시점과 논술 AI가 제출할 수 있을 만큼 근거가 갖춰졌다고 본 시점은 같지 않았다.
“이거 보고 최종글 작성”
공방이 끝난 뒤 논술 AI가 돌려준 것은 완성된 글이 아니라 다음 초안에서 고칠 순서였다. 방향 2가 다른 대안보다 나은 이유를 더 선명하게 세우고, 잘못 뽑는 비용뿐 아니라 학위 문턱 때문에 놓치는 인재의 비용도 함께 보라고 했다. 새 검증의 비용을 감수할 직무 범위와, 포트폴리오가 새로운 특권이 되지 않도록 같은 과제와 같은 평가 기준을 두는 방식도 보완하라고 했다.
공방 중에는 다른 AI의 문장을 붙여 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공방이 끝나고 나온 수정 지시는 다시 평소 쓰던 AI에게 옮길 수 있었다. 나는 그 내용을 복사해 첫 번째 AI 창에 붙여 넣었다.
“이거보고 최종글 작성”
첫 번째 AI는 글을 다시 썼다. 처음 초안은 새 평가 비용을 미래 역량을 위한 전략적 투자라고 불렀다. 마지막 버전에는 그 비용을 감수할 조건이 들어갔다.
“미스핏이 내부 재교육으로 흡수되지 않고 고객 프로젝트 손실로 전이되는 직무에서는, 며칠 빨리 뽑고 몇 달을 잃는 것보다 며칠 더 검증해 미스핏 한 건을 줄이는 편이 더 경제적이다.”
최종 문장은 첫 번째 AI가 썼다. 그러나 그 문장에 들어간 기준은 논술 AI와 공방하는 동안 구체화됐다. 첫 번째 AI가 ‘전략적 투자’라는 넓은 문장을 만들었고, 논술 AI가 비용을 감수할 조건을 물었다. 나는 적용 직무를 줄이고, 손실이 고객 프로젝트로 전이되는 경우라고 직접 답했다. 논술 AI는 그 내용을 다음 수정 과제로 정리했고, 첫 번째 AI가 다시 제출용 문장으로 만들었다.
나는 ‘무엇이 얼마나 자주 터져야 하는지’에 대한 숫자까지 새로 만들지는 않았다. 대신 손실이 고객 프로젝트로 번지는 직무라는 경계를 남겼다. AI가 제안한 모든 요구를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문장을 검토한 뒤, 이 버전을 최종본으로 삼았다.
문장은 먼저 도착했다
내 생각이라고 제출한 글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들어온 문장이 섞여 있었다. 내가 먼저 고른 방향이 있었고, 첫 번째 AI가 제안했지만 내가 납득한 주장도 있었다. 그럴듯해서 충분히 확인하지 않고 통과시킨 문장도 있었고, 질문에 직접 답하는 동안 뒤늦게 구체화된 기준도 있었다.
처음 초안을 읽을 때는 이 차이가 잘 보이지 않았다. 모든 문장이 같은 말투로 매끄럽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붙여 넣을 수 없는 대화창에서 답을 직접 치기 시작하자, 내가 실제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과 완성된 표현을 먼저 받아들인 부분이 조금씩 갈라졌다.
초안은 다른 AI가 썼다. 답은 내 손을 거쳐야 했다. 마지막 문장은 다시 AI가 썼다.
이번에는 논술 AI가 먼저 숨은 비용과 적용 범위를 물었다. 다음 글에서도 내가 문장보다 먼저 같은 기준을 꺼낼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른다.
이 글은 실제 참가 화면과 대화 로그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인용한 답변은 당시 입력한 오타와 띄어쓰기를 포함해 원문을 유지했다.